나의 역사인물 유적지 순례




'96년 8월11일~8월15일 다녀온 역사 인물 유적지를 소개합니다.

순례일정

김시습과 무량사
전봉준과 황토현 전적지
정철과 송강정
정약용과 다산초당
장보고와 청해진 유적터
곽제우와 충익사
나의 답사여정 소개



부여 : 김시습과 무량사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로 우리 문학사를 빛낸 김시습,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났던 그는 세 살 때 시짓는 법을 배웠으며 불과 다섯살에 '중용''대학'을 익혔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19살 되던 해에 야심만만한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을 내쫓고 정권을 움켜쥐는 이른바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는 더러운 세상, 사악한 권세가 정당화되는 현세의 질곡을 참지 못하고 현실에 환멸을 느껴 정처없는 방랑길에 나선다.

이율곡은 '김시습전'에서 이렇게 썼다. '김시습의 얼굴은 못생겼고 키는 작았지만 인품이 호탕하고 고매했다. 성품이 곧고 굳세어서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았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가슴아파 했으며 울분과 불평을 참지 못했다.'

그는 한때 서울에서 살았는데 궁핍하기 짝이 없었으나 호기만은 대단하여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루는 술에 취해 거리를 가다가 영의정 정창손의 행차를 만났다. 정창손은 사육신사건 때 거사모의를 밀고한 김질의 장인이었다. 김시습이 행차를 가로막고 외쳤다. "야, 이놈 창손아! 종 노릇이 편하냐? 네놈도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 정창손은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화가 났으나 창피해서 못들은 척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이처럼 조정 대신들 치고 길거리에서 김시습에게 한두 번 망신당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 기슭의 무량사는 김시습이 파란많은 생애의 막을 내린 곳으로 대웅전 뒤쪽 그가 머물던 승방 자리에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산신각과 매월당시비가 있다.

▶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부여까지 3시간 걸린다. 부여에서 외산행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간 후 외산에서 내려 무량사까지 걸어서 30분이면 무량사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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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 전봉준과 황토현 전적지

이름없는 시골 선비로 40고개를 바라보던 전봉준으로 하여금 활화산처럼 분노가 폭발하게 만든 직접적 원인은 탐욕의 화신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이었다. 전봉준이 조병갑에게 맞아 죽은 부친의 뒤를 이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찾아가 선정을 요구하였으나 대답은 여전히 몽둥이 찜질 뿐이었다. 1893년이 다 갈 무렵 전봉준은 이웃 신중리 대뫼 마을 송두호의 집에 20명의 동지를 모아 봉기를 결의하고 사발통문을 각 마을에 돌렸다.

1894년 음력 정월 초파일, 3백여 장정을 이끌고 말목장터로 달려간 전봉준은 수천의 군중을 모아 궐기할 것을 역설했고 낫,도끼,몽둥이,죽창 따위로 무장한 전봉준 부대는 10일 새벽 고부관아를 들이쳤으나 조병갑은 이미 야반도주하고 없었다. 조병갑의 파면으로 일단 해산한 농민군은 조정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의 군사가 고부군을 쑥밭으로 만들고 봉기를 주도한 동학교도들을 샅샅이 잡아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또다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호남 각지에서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보내 음력 3월 21일, 8천여 동학농민군을 백산에 집결시켰으며 그해 4월 5일 황토재에서 관군과 맞서 빛나는 첫승리를 거둔다.

▶ 승리의 함성이 우렁차던 황토재 마루턱에 탐관오리들의 가슴을 노리던 죽창같은 기념탑이 우뚝 솟았고, 그 아래 산기슭에 녹두장군의 동상과 함께 동학혁명 기념관이 세워졌다. 농민들의 원한이 뼛속 깊이 사무쳤던 만석보 옛터에도 기념비가 세워졌고 또한 녹두장군 전봉준이 민중의 파랑새로 힘차게 날개펼 때까지 살던 옛집도 복원되었다.

▶ 서울에서 전주까지 고속버스를 타고간 후 전주에서 정읍까지는 시외버스로 1시간 정도 걸린다. 정읍에서 덕천면까지 군내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며 던천면에서 황토현 전적지까지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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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 정철과 송강정

송강 정철은 쉽고도 평범한 우리 말들을 엮어서 주옥처럼 아름다운 시가를 지어냄으로써 국문학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세운 위대한 문인이다. 그의 가사문학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순탄치 못한 벼슬살이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관동별곡''사미인곡''성산별곡'으로 대표되는 그의 걸작 대부분이 좌천과 유배와 은둔의 시절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타협을 싫어한 강직한 성품은 영욕으로 얼룩진 무상한 정치가의 길을 걷게 했지만 그는 남달리 다스한 눈빛으로 자연과 인간사를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

선조 18년, 조정을 물러난 송강은 담양으로 내려가 이후 4년간 전원에 은둔,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고 시작에만 전념했다. 이때가 정치적으로는 좌절기였으나 문학적으로는 전성기였으니 '사미인곡'과 '속사미인곡' 같은 가사문학의 정수와 수많은 단가를 이때 남겼던 것이다.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산1번지의 송강정과 남면 지곡리 산75번지의 식영정은 송강문학의 산실이다. 평생토록 술을 사랑한 풍류가객이었던 송강의 권주가 '장진주사'가 46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금세라도 우리의 귓가에 쟁쟁 울려올 듯하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꺾어 셈하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몸 죽어지면 지게 위에 거적덮어 조라매어 지고가나
화려한 꽃상여에 만 사람이 울며가나.......

▶ 송강 정철의 유적은 크게 두군데로 묘소와 사당이 있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동과 그의 성장지이며 가사문학의 산실인 송강정과 식영정이 있는 전남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와 남면 지곡리이다.

▶ 광주에서 담양까지 직행버스를 타고 30분 걸린다. 담양에서 1시간 마다 있는 군내버스를 타고 쌍다리에서 내리면 바로 1백미터 앞에 송강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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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 정약용과 다산초당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여 불멸의 업적을 남긴 위대한 사상가이자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시인이었으며 박해받는 종교인이기도 했던 다산 정약용, 전남 강진은 다산이 18년 동안이나 귀양살이하며 저술에만 힘쓰던 곳이다. 강진군 도암면 귤동 마을 뒷산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은 그의 위대한 사상과 학문이 태어난 역사의 산실이며 예술꽃이 피어난 정신의 고향이다.

불세출의 명저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로 대표되는 5백권이 넘는 다산의 방대한 저술이 거의 모두 다산초당에서의 소산이었으니 이야말로 유배지에서의 비애와 절망과 고통의 세월을 꿋꿋이 살아 넘긴 민족의 거인 다산의 빛나는 인간승이가 아닐 수 없다.

1818년 귀향살이에서 풀렸을 때 다산은 이미 57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고향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18년간을 더 살았으며 몇차례 조정의 부름이 있었지만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1835년, 향년 7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는 순간 다산은 두 아들에게 검소하고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말라고 유언했다.

▶ 광주에서 강진행 직행버스를 타고 1시간 40분가량 간다. 강진에서 다산초당까지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30분가량 가면 다산초당 입구에 내린다. 입구에서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까지는 30분정도 걸린다. 강진으로 돌아갈 때 군내버스를 놓치면 1시간 30분가량을 기다려야 하므로 미리 차시간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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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 장보고와 청해진 유적터

우리나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초로 무적함대를 만들어 바다를 개척하고 동양 3국의 제해권을 장악한 위대한 바다 영웅 장보고, 그가 청해진을 세우고 무적함대의 기지인 동시에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삼았던 청해진터는 완도읍에서 동쪽으로 5km쯤 떨어진 장좌리와 마을 앞 170m 정도 떨어진 작은 섬 '조금도'이다.

청해진이 번성하던 당시에 장좌리에는 수많은 군사가 주둔하던 군영터였고 조선소였으며, 장군섬으로도 불리우는 조금섬은 장보고의 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장좌리 마을 뒤 상황봉 기슭에는 장보고가 중국에 있을 때 세웠던 것과 같은 법화사가 폐허로 변해 있고 그 부근에는 장보고 일가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이른바 '장보네묘' 몇기가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 광주에서 완도행 직행버스를 타면 3시간 가량 걸린다. 완도 터미널에서 장좌리 청해진 유적지가지 군내버스를 이용하는데 10분정도 걸리나 걸어가기에는 멀다. 버스가 1시간에 한대 정도 있으므로 시간을 잘 알아두는 것이 좋다. 장좌리에서 내리면 바닷쪽으로 장군섬이 보이는데 물이 빠져나가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96년 년말까지 섬 전체에 걸쳐 발굴이 진행중이므로 곳곳에 파헤친 흔적이 있고 다소 황량해 보인다. 섬 정상에 큰 나무가 있고 그 아래 사당이 있어 조금은 을씬년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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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 곽제우와 충익사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뛰어난 전략과 용병술로 불패의 신화를 남겨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곽제우, 경남 의령은 곽제우가 출생,성장한 고향으로 갖가지 유적들이 남아있는 곳이다.

곽제우는 일찍부터 벼슬길에는 뜻이 없었으나 부모의 뜻을 어기지 못해 34세 되던 해 처음으로 과거를 보아 2등으로 합격하였지만 답안지에 임금의 비위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다는 트집을 잡혀 며칠 뒤에 무효가 되었다. 이후로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지점인 기강가에 집을 짓고 시와 술과 낙시로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냈다.

한가로이 세월을 보내던 무명의 시골 선비 곽재우가 분연히 떨쳐 일어나 가재를 털어 의병을 모으고 붉은 옷 입고 은안장 얹은 백마 타고 서릿발 같은 장검을 휘두르며 왜적을 무찌르기 시작했으니 왜란이 일어난지 꼭 열흘째되던 날이었다. 정암진 전투는 곽제우의 의병 활동 중 가장 빛나는 승리로 꼽히는 싸움으로 의령을 공격하려던 왜군 2만명을 전멸시켰으며 정암진 싸움을 승리로 이끈 역사적 현장에 의병루가 세워져 있다.

"의병은 싸울 뿐이지 자랑하지 않는다"면서 필승의 전략으로 백전백승하던 유격전의 명장은 포상을 바라지도 않았고 부귀공명을 탐내지도 않았다. 전란이 끝나자 곽재우는 여러 차례 내려준 벼슬도 끝내 마다한 채 창녕군 길곡면 창암리 비슬산 기슭에 망우정을 짓고 풍진 세상의 온갖 잡사를 잊으려고 했다. 전란을 당하자 도망치기 바빴고, 도망치면서도 당파싸움을 계속해 숱한 충신,열사를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던 무능한 임금과 썩어빠진 조정 대신들은 벼슬자리를 버렸다고 2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시킬 때에도 곽재우는 이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강호 초야에 묻혀 있다가 국난을 당하자 떨쳐 일어나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백전백승하며 나라를 구한 불패의 홍의장군 곽재우는 다시 산수간으로 돌아가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다섯 아들에게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말도록 타이르며 이런 시를 읊었다.

부귀 영화를 버리고 구름산에 누웠으니
근심을 잊어서 몸이 절로 한가롭구나
예부터 신선이란 없다고들 하건만
오로지 마음으로 깨우친 순간 신선이로다.

▶ 의령군 중동 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충익사는 곽재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7천여평의 대지 위에 의병탑, 충의문, 충익사, 충익각, 기념관 등 여러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정암진은 의령읍에서 3km쯤 떨어진 남강 줄기에 있다. 왜구를 무찌르던 전방지휘소격인 정암나루 북쪽 벼랑 위에는 의병루가 서 있다.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고향 유곡면 세간리는 의령읍에서 대구 쪽으로 20분가량 가는데 옛 집터 앞에는 그가 북을 매달아 치며 의병을 모으던 현고수가 아직도 4백년의 모진 세월을 버티고 살아 남아 옛일을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다.

▶ 서울에서 의령까지 직행버스를 이용하거나 대구나 진주까지 가서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진주에서 1시간 가량 걸린다. 의령에서 내리면 군내버스로 10분 정도 걸리며 시간이 있다면 걸어서도 충분히 갈만한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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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답사 여정 소개

◆ 첫날, 서울 남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6시55분 부여행 버스를 탔다. 부여에 7시 40분경 내려 인근 숙소에서 일박을 하였다.

◆ 둘째날, 아침 10시25분 외산행 시내버스를 타고 11시 경에 외산에 도착, 걸어서 무량사까지 30분 정도 걸렸다. 무량사를 둘러보고 외산에서 논산행 버스를 타고 3시경 논산에 도착하여 다시 수락산행 군내버스를 타고 수락산까지 40분 정도 걸려서 간 시간이 4시 30분 경. 사실 수락산에서 계백장군 묘소를 찾아볼 계획이었으나 도저히 찾을 길이 막막하여 포기하고 다시 논산으로 돌아왔다가 전주로 내려간 시간이 저녁 7시 경이다. 전주에서 일박.

◆ 세째날, 아침 9시 전주에서 정읍행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걸려 정읍에 도착, 정읍에서 덕천면 군내버스를 타고 30분정도 걸려 덕천면에 내려서 황토현전적지까지 걸어서 30분 정도 걸렸다. 유적지를 돌아본 후 덕천면까지 걸어나와 군내버스를 타고 정읍으로 돌아온 시간이 오후 1시30분이다. 이때는 운이 좋아서 곧바로 군내버스를 탈 수 있었는데 아까 올때 탓던 그 버스였다. 기사아저씨와 반가운 눈인사. 정읍에서 광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2시40분에 도착. 광주에서 담양행 시외버스를 타고 20분만에 담양에 도착했다. 이때가 3시. 담양에서 쌍다리까지 군내버스로 20분 정도 소요. 쌍다리에서 내리자 전방 1백여미터 앞에 송강정이 보여 한걸음에 달려갔다. 송강정에서 만난 할머니는 손자 손을 붙잡고 유적지를 돌아보는 중이었는데 나와 애기가 잘 통하던 차에 함께 자신의 승용차로 송강 정철의 또다른 유적지인 인근 '식영정'까지 가자는 권유를 했으나 내 일정이 빡빡해서 사양했다. 쌍다리에서 40여분을 기다려 군내버스를 잡아타고 5시에 담양에 도착, 다시 광주행 버스를 타고 5시30분에 광주에 도착한 후 강진행 버스를 타고 5시40분에 출발하여 7시20분에 도착했다. 강진에서 일박.

◆ 네째날, 아침 9시20분 다산초당행 군내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걸려 입구에 도착. 다산초당까지 걸어서 30분 정도 걸렸다. 초당에서 내려와 강진까지 가는 군내버스를 놓쳐 무려 1시간 20분을 기다렸다. 강진에 온 시간이 12시50분. 간단히 점심을 먹고 1시10분 완도행 시외버스를 타고 달려 2시에 도착했다. 군내버스를 기다리다가 도저히 시간이 맞지 않아서 택시를 타고 장좌리 청해진 유적지에 도착(\4,000원 지불). 장군섬을 둘러보고는 다시 터미널로 가려는데 군내버스가 언제 올런지 막막... 태풍이 곧 들이닥칠 시간이 다 되어 빗방울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기세인데 버스는 보이지 않고, 또다시 지나가는 택시를 가로막고 세워 합승한 덕분에 1천원에 터미널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완도에서 다음 목적지인 의령을 가기 위해 순천을 거쳐 진주를 지나야 하는데 순천행 막차가 떠난 후라 어쩔 수 없이 4시에 광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6시30에 광주 도착, 일박함.

◆ 다섯째날, 아침 10시에 순천행 버스를 타고 12시30분에 도착, 다시 진주행 버스를 타고 1시에 출발하여 2시10분에 도착했다.

진주에서 의령행 3시10분 버스를 타고 4시10분에 의령 도착, 의령에서 충익사까지 군내버스를 타고 10분 걸려 목적지 도착했다. 충익사를 둘러본 후 의령 터미널까지 걸어가 대구행 5시40분 버스를 탔다. 대구를 가면서 무척 고민을 했는데 그 이유는 그 다음 일정을 잡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은 강원도 영월에 가서 김삿갓의 유적지를 둘러볼 생각이었는데 전날 밤새도록 교통편을 짜봐도 도저히 길이 안보이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차선책으로 대구를 거쳐 경주에 가볼 생각을 했지만 왠지 신라 유적지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의령을 끝으로 이번 여행을 마치기로 결정했다. 대구에서 심야고속버스를 타고 밤10시에 출발하여 서울에 새벽2시 도착, 이로서 짧고도 긴 나의 여행은 끝을 맺었다.

생각해보면 버스타고 다닌 기억밖에 없을 정도로 버스를 많이도 타고다녔고(총 1,620분=27시간) 막상 유적지를 둘러본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나의 계획과 의지에 의해 자유롭게 나의 여정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여유와 새로운 힘을 주기에 충분한 시간들이었다.

끝으로 이번 여행을 계획하고 이곳에 실린 글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은 책은 '역사 인물 유적순례'(수문출판사, 황원갑 지음) 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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